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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4 찬란한 저녁 퇴근길 홍제역에서 보는 서쪽하늘. 해 질 무렵 찬란한 노을을 보면 지친 하루였어도 마음이 누그러진다. 노을을 볼 수 있다는 건, 아직 내 맘대로 보낼 수 있는 저녁 시간이 남았다는 것. 필터 없이도 이런 하늘을 찍을 수 있는 순간은 짧고 그래서 귀하다. 여름의 끝자락, 타는 노을.
230727 어린이에게 빨간책을! (성냥팔이소녀의 반격) 제목부터 성냥팔이소녀의 '반격'이다. 붉은색의 성냥과 불꽃과 빨간 머리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 책은 빨간책이다. 붉은색이 주요 이미지로 쓰여서이기도 하지만, 내용도 '빨갛다'. "분노가 인간다움을 되살린 것 같았어."(p.161) 분노와 인간다움을 연결하고, 파업을 말한다. 함께 연대하고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조명한다. 그렇다고 마냥 희망만을 말하는 건 아니다. 세상을 바꾸는 불꽃이 피어오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스러졌고, 세상은 선의로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도 보여준다. 그럼에도 우리는 함께 더디게 나아진다고 말한다는 점에서 나는 이 책이 마음에 들었다. 어린이들을 위한 이야기라는 동화가 보여주는 건 어떤 세상에 대한 지향(점)이다. 그래서 핑크빛 결말 뿐아니라 때로는 잿빛, 무지갯빛 등 다양한 시선으로..
230411 좋아하는 동네에서 일한다는 것 📍 정동(길) “정동길을 좋아합니다. 매일 걷는 출퇴근길이 정동길이면 좋겠습니다. 정동길의 사계절을 함께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입사 최종면접에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냐는 질문에 뜬금없는 고백을 했다. 나는 좋은 동료가 될 자신이 있다고, 인연이 닿으면 함께 일할 수 있지 않겠냐고 준비했던 하고 싶은 말을 이미 다 해버렸기 때문일까. 막바지에 긴장이 풀려서 아무말이나 해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그 회사에서 7년째 일하는 지금, 그때 그 고백은 어쩌면 뜬금없는 게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 펜데믹 이전엔 무조건 출근해야 했던 내게 회사가 위치한 곳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일에 지치고 회사가 가기 싫은 때에도 그래도 아침에 좋아하는 곳으로 향한다는, 작은 위안이 됐다. 정동은 낯설..
230429 꽃길을 달렸다 📍홍제천 말 그대로 ‘꽃길’을 달릴 수 있다. 연희동으로 이사 오면서 러닝이라는 취미를 가지게 됐다. 다 홍제천 덕분이다. 요즘 시들해진 달리기에 다시 재미를 붙여보려고 오랜만에 나섰다. 유진상가-포방터시장 쪽으로 달려가는데 생각 못한 꽃길을 만났다. 차도 옆에 심긴 철쭉이 떨어져서 이런 꽃길을 만들다니. 솔직히 진한 보랏빛, 빨간색, 흰색의 강렬한 색감을 자랑하는 철쭉이 예쁘다고 생각한 적은 별로 없다. 그런데 한밤의 달리기 중 만난 보랏빛 철쭉은 예뻤다. 빨리 반환점을 찍고 돌아와 사진을 남기고 싶을 정도로. 아직 철쭉은 한창이다. 그러고 보니 만개한 철쭉 꽃길은 어젯밤부터 하루종일 내린 비 때문인듯하다. 비 온 덕에 꽃길러닝을 다 해보네. 괜히 한밤에 나가서 달리고 싶었던 게 아니었나 보다. 달릴까..
230427 달콤하고 확실한 행복, 망원동 키오스크(KIOSQUE) 📍망원동 키오스크(KIOSQUE) 10여 년 전 대학생 때 교지 친구들과 참 많이 돌아다녔다. 왕십리 밖을 이리저리 걸어 다니기 좋아하던 우리는 서울의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녔다. 강남의 세련됨에 왠지 기가 죽고 북적이는 활기에 지레 피곤해하던 우리는 강북을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서촌은 우리가 자주가던 동네들 중 하나였다. 어느 날 배화여대 근처에 맛있는 프렌치토스트가 있다며 한 친구가 이끌었다. 외관은 철판으로 만들어진 작은 큐브 상자 같았다. 어둡고 좁은 실내가 마치 동굴 같았다. ‘프렌치토스트가 맛있어봐야...’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도 맛에 엄청난 기대를 품은 건 아니었다. 그런데 한입 먹기 전에 눈으로 보고, 또 한입 잘라 입에 넣고는 진심으로 감동했다. 유럽의 맛이잖아...! (아마 그때까지 나는..
4 공교롭다 공교롭다 工巧롭다 (형용사) 공교로워/ 공교로우니 1. 생각지 않았거나 뜻하지 않았던 사실이나 사건과 우연히 마주치게 된 것이 기이하다고 할 만하다. 공교롭게도 아들과 아버지의 생일이 같다. 박상영 작가의 글은 머뭇대지 않고 내지르는 맛이 좋다. 주저 않고 훅 치는 소설 속 대사가 서사에 몰입감을 높인다면, 에세이에선 거침없음 그 자체가 매력이 되어 글을 계속 읽게한다. 작가의 대학시절 아르바이트 에피소드는 한 편의 이야기처럼 읽혀서 마치 한 편의 단편 소설 같았다. 빠져들어 읽다가 '공교로운' 이라는 단어에 공교롭게도 꽂혔다. 낯익은 표현이지만 문득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공교롭다의 뜻이 뭐였더라. 우연스러운 느낌적 느낌은 알겠는데, 뭐라 설명이 안 되어서 사전을 찾아봤다. '생각지 않았거나 뜻하지..
230319 봄날의 도시락을 좋아하세요 일요일에 출근하면 회사가 유독 조용하다. 편집국에는 채워진 자리보다 비워진 자리가 훨씬 많다. 출근한 사람이 적어 난방이 원활하지 않기도 하지만 빨간날 사무실은 유난히 휑하고 썰렁하다. 드문드문 꽤 하는 휴일 출근은 칠 년째 여도 익숙하지 않다. 남들 놀 때 같이 쉬고 싶은 마음은 연차가 쌓여도 가라앉지 않는다. 일요일 출근을 할 땐 전주 금요일에 미리 당겨 쉬지만 그래도 출근을 하면 괜히 억울하다. 물론 남들 일할 때 노는 금요일은 억울한 일요일만큼이나 짜릿하다. 오전 평근 업무를 하고 동료들과 근처 중국집에서 탕수육과 짜장면을 든든히 먹었다. 편집국이 춥다며 따뜻한 라떼 한잔도 사들고 올라왔다. 슬슬 새로 전송된 기사를 보면서 어떤 기사를 포털에 올릴까 고르던 찰나 친구에게서 카톡이 왔다. [내려와봐..
3 삼삼하다 삼삼하다 (형용사) 삼삼하여(삼삼해)/ 삼삼하니 1. 음식 맛이 조금 싱거운 듯하면서 맛이 있다. 2. 사물이나 사람의 생김새나 됨됨이가 마음이 끌리게 그럴듯하다. 얼굴이 삼삼하게 생기다. 지금 내가 자네를 생각하고 삼삼한 처녀를 하나 점찍어 두었네.출처 맛이 삼삼하다, 심심하다, 간간하다. 한 글자가 반복되는 첩어들. 전에 삼삼한 맛은 뭘까 궁금한 적이 있었는데, 귀찮아서 뜻을 찾아보지 않고 대충 간간하다와 비슷한 느낌이겠거니 넘어갔다. 마침 에세이를 읽다가 '삼삼한 일'이라는 표현을 마주한 김에 찾아봤다. 짠 것보다는 밍밍 쪽에 더 가까웠다. 맛이 싱거운듯 하면서 맛있을 때 삼삼하다고 할 수 있다. 불만족보다는 만족에 가까운 뉘앙스다. 불만족에 가까워지면 밍밍하다가 된다. (밍밍하다: 음식 따위가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