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홍제천을 뛰었다. 한 시간여 달리고 나니 맥주가 당겼다. 시원한 맥주를 마시고 싶은데 술을 마시고 싶진 않았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인가 싶지만, 맥주를 마시고 싶지만 알코올은 피하고 싶을 때가 있다. 딱 맥주 마시는 기분만 내고 싶은데! 이럴 때 찾을 수 있는 건 논알콜 맥주다.
대학생 때 크리스마스 이브에 친구와 토익학원을 가면서 논알콜 맥주를 사 먹어 본 적이 있는데, 그때 마신 논알콜 맥주는 정말 맛이 없었다. 맥주 맛을 흉내 낸 음료수 같은 느낌? 밍밍하고 이상했다. 앞으로는 차라리 그냥 맥주를 마시든, 아니면 아예 마시지 말자고 마음 먹었다. 그날 이후로 논알콜 맥주를 사 먹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오늘은 정말 맥주를 마시는 기분을 내고 싶은 날이었다. 힘껏 달리고 나서 시원하게 마시는 맥주 한 잔의 맛(보다 사실은 기분)이 간절했다. 목감기약을 먹고 있어서 진짜 맥주를 먹기엔 왠지 간에 못할 짓을 하는 것 같고, 또 운동을 한 게 아깝기도해서 논알콜 맥주에 다시 도전해보기로 했다. 언젠가 트위터에서 논알콜 맥주 중에선 칭따오와 하이네켄이 맛이 괜찮다고 했던 게 떠올랐다. 편의점에 들러 칭따오 논알콜을 사와 냉동실에 넣고 샤워를 마친 후 빠르게 캔을 땄다.
칙-차아아. 유리 고블렛잔에 맥주를 따르는데 거품이 제대로 난다. 탄산도 살아있다. 오? 이거 왠지 괜찮을 것 같은데 기대를 품고 한 입 들이켰다. 어? 맥주 맛이네. 뭔가 홉맛도 나고 목 넘김도 찌르르 시원했다. 신기해서 한 모금 더. 오? 정말 괜찮네. 싱겁지 않아서 맥주를 마시는 기분이 제대로 들었다. 찾아보니 칭따오 논알콜릭은 기존 맥주 공정 그대로 라거를 만들고 나중에 알코올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맥주의 맛과 매우 흡사하다.
알코올 향이 덜한 맥주음료의 맛을 음미하는 건 어떤 의미일까. 술을 취하려고 마시는 게 아니라 그 맛 때문에 찾았다는 사실이 묘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맛보다 마시는 '기분' 때문에 찾은 거긴 하지만 말이다. 한 주를 마치고 난 금요일 밤, 혼자 집에서 맥주를 마시는 어른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여유를 가지고 싶었던 건 아닐까. 재밌게 봤던 일드 '호타루의 빛'에서 호타루가 "얏빠 이에가 이치방!(역시 집이 최고야!)"을 외치며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던 그 모습에서 느껴졌던 해방감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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