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자 2차 접종을 하고 노곤했지만 할 일이 있어 업무를 마치고, 서점에 들렀다. 바닥에 앉아서 책을 한참 보고 있는데 미니 스케치북을 든 여자분이 말을 붙여왔다. "저기... 제가 과제로 인물스케치를 해야 하는데, 책 읽으시는 모습 그림 그려도 될까요?" "아, 예. 괜찮아요." '과제와 취재는 돕는 것이다' 신조에 따라 흔쾌히 허락했다. 누군가에게 말을 붙이는 것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니까.
별생각 없이 책 보다가 슬슬 다리가 저려 일어나는데 맞은편에서 그림을 그리던 분이 "아, 이거 완성은 아직 아닌데, 사진 찍어가셔도 돼요!" 하며 보여주셨다. '신기한 경험이네' "감사합니다" 그림을 사진으로 찍고 떠나려는데 말이 이어졌다. "제품 디자인 관련해서 과제를 하려면 추후에 인터뷰도 필요한데요. 연락처를 블라블라~~~~~"
순간 든 생각. "혹시 사이비?"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의심이 불쑥 튀어올랐다. 나름의 기지를 발휘해서 "인스타 아이디 알려드려도 되나요? 필요하시면 디엠으로 인터뷰해요." 했더니 "또 연락은 어려우신 거죠?" 하며 그는 쉽게 돌아섰다. 결국 목적은 연락처였나.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연락처를 쉽게 알려줄 사람이 있을까. 과제라면 디엠으로도 충분히 가능할 텐데...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자 의심이 확신이 됐다.
처음엔 나를 보고 그려준 그림이니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휘리릭 사라지는 그를 보고나서 다시 본 그림은 그려야 해서 그린, 나와도 닮지 않은 미끼처럼 느껴져 꺼림칙했다. 꼭 사이비였든, 아니면 다른 목적이었든 세상에 참 쉬운 게 없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의 연락처)을 꾀어내기위해 몇십 분간 포섭 대상을 그리는 수고로움을 감수하는 마음은 뭘까. 거짓 목적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손을 움직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만약 내가 순순히 전화번호를 주었다면? 그 이후에는 어떤 이야기를 하게 되었을까.
세상이 작은 선의와 호의로 그나마 온전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믿는데, 가끔 이런 일을 맞닥뜨리면 생각이 복잡해진다. 선의와 호의의 틈엔 악의와 함정도 있을 수 있는 거지. 온전히 빛으로만 돌아가는 세상은 없는 거지. 이마를 한 대 탁 맞은 기분이 든다. 그럼에도 그 앞에서 불쑥 기지가 피어오를 때, 아 오늘도 이렇게 살아냈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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