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차 내고 세저리 다녀온 날.
"쌤 제가 할 수 있을까요? 별 도움이 안 될 거 같아요." 일 대 다 커뮤니케이션에 유독 더 취약한 나는 사실 가는 날 새벽까지도 잠을 잘 못 잤다. 발표 준비를 다 못했기도 했지만 실수할까봐 무섭고 떨렸다. 네 명이서 나눠서 하는 이십분짜리 '경제사회토론' 발표도 버거워하며 떨던 사람이 두 시간(쉬는 시간 포함)동안 여러개의 눈을 마주하고 그 앞에서 혼자서 말을 한다고?
'못한다고 할 걸. 대차게 거절할 걸.' 후회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래도 약속은 지켜야하니까. 너무 노잼일까봐 중간에 잔잔한 웃음포인트도 넣어가며 스크립트를 짰다. (애드립이라는 것도 준비해야 하는 편ㅠ) 그리고 마음 먹었다. 무리해서 유쾌하게 하려 하지말고, 딱 아는 만큼만 내가 고민한 만큼만 말하자. 멋져보이는 말 대신 진짜 내가 하고 싶은 말, 할 수 있는 말만 하자고.
두 시간여 버스를 타고 도착한 문화관. 놀랍게도 몇몇 연구실 명패랑 꺼진 소파 자리에 싱크대가 생긴 것 말고는 그대로였다. 대여섯명 오겠지 생각했었는데 훨씬 많은 인원들이 와서 당황스러웠다. 왜 이렇게 많이 오셨어요. 전 '그나마' 소규모 대화에 능한데... 울고 싶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많이 고마웠다. 각자 자기의 귀한 시간을 내어 준 거니까. 앞에 서 있는데 낯선 얼굴들에게서 육칠년전 내 표정이 보였다. 맞다 나도 저랬었는데. 그렇게 많은 (이라고 해도 스무명 남짓이었을 듯) 얼굴을 마주하고 내가 좋아하는 일, 잘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 준비한 것들을 말했다. 중간에 멘붕이 올 것 같기도 했지만, 그래도 완주하고 즉석 질문도 받았다.
말을 잘 하는 사람들에겐 별 감흥 없는 경험일 수도 있었겠지만, 내게는 매우 특별한 경험이었다. 우선 다수 앞에 서는 것부터가 큰 용기였다. "인마. 당연히 할 수 있지. 너가 고민하는 거, 생각하는 거 그런 걸 말하면 돼." 랑쌤의 제안이 아니었다면 엄두도 내지 않았을 일이고, 흔쾌히 "좋아요" 대답하지도 않았을 거다. 오늘도 랑쌤에게 배웠다. 씩씩하게. 늘 내게 씩씩을 주문하는 쌤 앞에서 씩씩한 모습을 보일 수 있어서 뿌듯했다.
몇몇 후배들과 랑쌤과 저녁을 먹었는데, 랑쌤답게 돌아가면서 일분 스피치 후 한 마디씩 하는 건배사 시간이 있었다. 난 건배사도 못하고 싫어하지만... 결국 내 차례가 왔다. "오늘 다 처음 보는 낯선 얼굴들인데 표정들은 낯설지가 않았어요. 그 얼굴들에서 세저리 시절의 제가 생각났습니다. 귀한 시간을 나눠주어서 고맙고, 저도 덕분에 그때의 저를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럼 제가 우리 할게요. 또 만나요 해주세요." 와 이건 준비했던 게 아니었는데 술을 마셔서 그런지 술술 나왔다.
랑쌤과 무궁화호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쌤이 음악들을 선곡해서 들려주셨다. 에릭 사티를 듣다가 잠이 설핏 들었다. 중간에 양희은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를 들었고, 야마구치 모모에의 좋은날 여행도 들었다. 청량리에 도착할 쯤엔 전인권의 행진을 들었고, 마지막 곡은 해바라기의 갈 수 없는 나라였다. 1호선을 타고 오다 종로3가에서 내가 먼저 내렸다. 카메라 어플을 켠채로 내린 덕에 쌤을 잘 담을 수 있었다. 40일만 더 걸으면 365일간 만보를 걷게된다며 자랑하는 쌤은 앞으로 완행열차를 타고 여행해보고 싶다고 했다.
어찌됐든 큰 퀘스트를 해낸 하루다. 돈을 받는 것도 아니었고 교통비에 밥값에 나간 게 더 많지만 내게 많은 걸 가르쳐준 곳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어서 좋았다. 엄청난 강연을 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오늘 나 좀 괜찮았던 것 같다.
'일상 것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3 월말 결산] 🌙 2월 : 먹거리에 눈뜬 달 (1) | 2023.03.02 |
---|---|
211109 전자레인지 없이 산다 (0) | 2021.11.09 |
211027 "저기...혹시 그림 그려드려도 될까요?" 사이비 대처법 (0) | 2021.10.29 |
210903 금요일 밤엔 칭따오 논알콜 맥주를 (0) | 2021.09.05 |
210903 문디목딱? 에어프라이어에 고구마를 넣으면 (햇 밤고구마 먹는법) (0) | 2021.09.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