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끽한 것들

230916 [연극/두산아트센터] 식물도 인간도 '잘못된' 성장은 없다 <잘못된 성장의 사례>

더띵 2023. 9. 22. 23:03

올해 발견한 장소 중 하나는 두산아트센터다. 이곳에서 두산인문극장 2023 강연(노년내과 의사 정희원 선생님의 강연을 듣고 잘 늙는 법에 대해 배웠다)을 들었고, 연강홀에선 뮤지컬 <히스토리 보이즈>도 봤다. 인스타그램을 둘러보다가 평소 취향이 멋지다고 생각했던 분이 이 연극을 자신의 '올해 최고 연극'이라고 칭찬한 스토리를 보고 냅다 예매했다. 
 

DAC artist 젊은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프로젝트라는데 처음 봤지만 결과물이 재밌어서 또 보고 싶다.


무대의 측면을 관객에게 열어둔 연극은 처음이라서 무대 구성부터 신기했다. 식물분자생물학 연구실을 고스란히 옮긴듯한 디테일들에 극이 시작하기 전부터 기대가 커졌다. 좌석은 비지정석이라 측면에 앉을까 정면에 앉을까 고민하다가 익숙한 정면 가운데 자리에 앉았는데, 측면에 앉았다면 몇몇 장면에서 은주의 폭발하는 감정 등을 더 잘 볼 수 있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결국 어떤 자리가 좋은가 하면 둘 다 괜찮다.  
 
시놉시스를 보면 이렇다.
 
시놉시스
지방 소도시 국립대학 식물분자생물학 연구실. 교수 은주가 운영하는 이 연구실에서는 식물 속에 존재하는 저항성 유전자를 찾고 있다. 연구실 초창기 멤버인 박사과정 혜경과 오직 논문 통과에만 정신을 쏟고 있는 석사과정 예지, 식물학자가 될 꿈에 부푼 인턴 인범, 출산 후 복귀한 포스트닥터 지연은 같은 공간에 있지만 삶의 방식도 목표도 다르다. 한여름 무더위로 지역 일대가 정전된 어느 날. 혜경은 교문 앞에서 아버지에게 맞고 있던 아이를 보게 되고, 저항성 유전자가 발현되듯 서서히 지난 경험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진짜 연구실 같은 무대 디테일이 신기했다. 왠지 공기도 연구실 느낌.

 

서론

[실험재료 및 방법]
1. 식물재료 : 애기장대 Col-0
2. 예비 실험
3. 형질전환체 생성
4. 식물체의 환경 스트레스 처리
_ 1) 고염 삼투 저온 스트레스 저항성 측정
_ 2) 환경 스트레스 관련 유전자 발현 조사 1
_ 3) 환경 스트레스 관련 유전자 발현 조사 2

결과 및 고찰
 
논문처럼 구성된 극의 형식도 인상적이었다. 극은 식물과 인간을, 식물을 기른다는 것과 부모의 양육을 빗대어 이야기했다. 식물은 환경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기에 그 안에서 적응하고 성장하는 법을 깨우친다. 성장하면서 환경을 바꾸는 시도를 해볼 수 있긴 하지만 인간도 비슷하다. 태어날 때 자신의 부모와 가정을 택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시작은 주어진 환경에서 어떻게든 해보는 거다. 식물이든 인간이든 완벽한 환경이 주어지기란 매우 어렵다. 그리고 완벽한 환경이라는 게 존재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극에서 인상적이었던 메시지는 '식물을 말할 땐 종의 다양성을 말하면서, 왜 사람에는 그게 적용되지 않냐'는 혜경의 외침이다. 또 환경에 적응하고 반응하는 방법은 각각 다를 수밖에 없는데, 그 결과를 두고 외부에서 성공, 실패를 판단하는 것은 비윤리적이다.
 

이건 측면에서 본 모습. 이 방향으로 앉았다면 후반부에 폭발하는 장면이 더 생생했겠지?


"가정폭력 당한 아이에게 누군가 무심코 '저런 아이는 커서 뭐가 될까'이 한 줄에서 연극 <잘못된 성장의 사례>는 시작한다.
강현주 연출가는 연출노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종종 누군가의 삶을 예측하는 과정에서 '걱정을 가장한 편견'을 마주하곤 한다.
생명을 가진 개체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삶의 방식이 존재하는 이곳에서
누군가의 삶을 짐작하는 일이 가능하긴 한 걸까.
삶에는 수많은 우연과 오류가 존재하고,
우리가 결코 살아내기를 포기하지 않는 성질을 가졌다면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닐까.
예측 불가능한 각각의 삶을 단정하기보다 지지하는 마음을 기대해 본다. 

 


맞다. 누군가의 삶을 짐작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그러니 쉽게 짐작해선 안 된다. 결코 살아내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그것만으로 이미 의미는 충분하기 때문에, 또 의미라는 건 외부의 누군가가 결정할 일이 아니다. 그러니 우리는 각각의 삶을 지지할 필요가 있다. 명쾌한 메시지로 극을 이끌어가는 에너지가 좋았다. 중간중간 대학원 유머 코드 살려서 숨 쉴틈도 있었고 덕분에 힘들지 않은 관극이었다. 극의 메시지에 공감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게 느꼈을 수도. 9월 23일까지 두산아트센터 Space111에서 공연한다. 두산아트센터 회원으로 가입하면 28000원에 예매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