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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것들

210528 선배가 되는 건 어렵다

이번주는 수습교육이 있는 주였다. 수습으로 들어온 후배들 앞에서 내가 하는 업무에 관해 혼자서 1시간 강의를 하고, 과제를 주고 피드백을 했다. 이전 기수 후배들을 만났을 때도 수습교육에 참여하긴 했지만 그때는 바로 위 선배와 함께 강의를 진행했고, 덕분에 부담이 덜했다. 그런데 이번엔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기획하고 진행해야해서 매우 부담스러웠다.

야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속이 타서 메로나를 사 먹었다. 그 다음날엔 수습교육을 했는데 이날도 속이 탔는지 귀가길에 또 아이스크림을 사먹었다. 이날은 속이 타는대다 허하기도 했는지 부라보콘 피스타치오맛을 먹었다.


오늘로 어찌저찌 끝내긴 했지만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않다. 강의 시간엔 준비해간 자료를 읽어내는데 급급했고, 소통은 꿈도 못꿨다. 너무 떨리니까 말은 빨라지고 내가 생각하는 속도보다 빠르게 나가는 말의 속도가 실수를 낳고, 실수는 당황을 부르고, 그렇게 숨가쁘게 망했다. 좋은 수업도 편한 수업도 하지 못했다.

"질문 할 거 있냐"고 묻던 선배들의 질문에 할 말이 없어서 막막했던 내 수습시절을 생각하며 그런 질문은 하지 않겠다던 다짐도 지키지 못했다. "음... 저도 궁금한 거 없냐, 질문할 거 없냐는 선배들 질문에 할 말이 없어서 당황스러웠거든요. 그래서 질문할 거 있냐고 묻는 건 하지 말아야지 했는데.. 이 자리에 있으니까 궁금한 거 있냐고 묻게되네요. 하하" 이렇게 결국 질문을 하고 말았다.

그런데 돌아보면 자리가 자리여서 저런 질문을 하게 됐다는 내 말은 핑계다. 막상 나도 후배들에게 질문할 거리가 별로 없었다. 내가 후배들에게 궁금했던 건 뭐였을까. 어떻게 입사하게 됐는지, 이 일을 왜하고 싶은지 이런 거였나. 잘 모르겠다. 뭘 좋아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이런 게 궁금했던 것 같기도한데 그런 걸 묻기엔 포멀한 시간이었으니까. 그래놓고 어색함을 견디지 못해 내가 요즘 하고 있는 달리기에 대한 이야기랑 할 때마다 바뀌는 mbti를 설명하며 아무말을 쏟아내버렸다.

새로운 사람이 들어와서 반갑고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긴 하지만, 막상 또 깊게 알고 싶었던 건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냥 뉴페이스에 대한 호기심 정도의 관심이라 딱히 할 질문이 없었던 건 아닐까. 같은 부서에서 함께 일할 후배가 아니라 언젠가 다른 위치에서 협업을 할수도 있는 정도의 후배라서 그랬나. 질문이라는 건 상대에 대한 관심(애정)의 정도에 비례한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느꼈다.

이번 수습교육을 하면서 다음에 수습교육을 하게 된다면, 딱 아는 만큼만 천천히 말하는 것. 이것 만이라도 지키자고 다짐해본다. 그리고 하지 말아야할 것은 좀 많은데, 정리해보자. 우선, 너무 잘 설명해주려고 내가 잘 모르는 내용까지 끌어다 말하려고 하지 말 것. 이렇게 말하다보면 나중에 틀린 부분이 생각나서 후회스럽다. 그리고 설령 후배가 앞에서 자세를 잡고 졸아버린다해도 당황하지 말 것. 나에게는 진심인 시간이었대도 그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시간일 수 있고, 그의 (졸겠다는) 선택에 당황하고 상처 받으면 나만 힘들다. 마지막으로 너무 온 마음을 다해서 대하려고 하지 말 것.

쓰고보니 닳고 닳은 마음이 티가 난다. 아직 직속 후배를 만나지 못했지만, 그래서인지도 모르겠지만 잠깐 왔다갈 후배에게 너무 깊은 마음으로 대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서로가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편한 것 같다. 나를 애정으로 대해준 선배들에게 너무 고마웠어서 나도 온 마음으로 환대와 애정을 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적당한 거리가 도움이 될 때가 분명히 있다. 이번 수습교육을 통해 되레 내가 느낌적으로 배운 것이다.

좋은 선배가 되고 싶은데, 좋은 선배가 되기는 어렵고 꼰대가 되기는 정말 쉽다. 잠을 깨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없이 졸고 있는 후배의 모습이 황당했고, 성의 없이 낸 과제에 기분이 상해버렸다. 결국 기분이 나빠졌고 그에 대해 좋지 않은 첫인상을 가지게됐다. 내 기분에 따라 상대를 나름대로 평가하고 만 거다. 물론 그들도 부족한 내 모습을 보고 실망하고, 별로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잠깐의 만남으로 누군가를 쉽게 판단하는 건 꼰대의 싹수가 보인다고 해야하나. 벌써 꼰대가 될 가능성이 보이다니. 주의해야겠다.

이렇게 쓰고나니 적당한 관심을 두면서 함부로 평가하지 않는, 초연한 선배가 되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